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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댄스 사교댄스와 음악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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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터벅 (Jitterbug)

스윙 댄스는 20 세기 초에 뉴욕시의 아프리카 계 미국인 커뮤니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많은 나이트 클럽은 인종 차별로 인해 백인 전용 또는 흑인 전용 정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할렘의 사보이 볼룸은 백인과 흑인이 함께 춤을 추는 것을 허용하는 차별 금지 정책을 가지고 있었고 린디 홉 댄스가 번성했습니다.
조지 스노든과 프랭크 매닝 과 같은 댄서에 의해 시작되었고. 지터벅이라는 용어는 원래 흑인 후원자들이 "엉뚱한 벌레"와 같이 의도한 것보다 더 빠르고 점프하며 춤을 추기 시작한 백인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조롱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와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공연 그룹 화이트의 린디 호퍼스가 출연한 이 춤이 등장하면서 린디 홉과 지터벅이 할렘 밖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1938년, 지터벅 댄서인 주크 조인트와 댄스 홀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연주한 춤에서 개발된 지터버깅인 캐롤라이나 마우와 싱글 린디 홉 댄스는 로큰 롤이 인기를 끌었을 때 더블 린디 홉에 길을 준 지터벅의 기초를 형성했습니다.

할렘의 댄스 홀인 사보이 볼룸은 흑인 주민과 백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유명한 다문화 행사장이었습니다. 사보이볼룸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한 린디 홉 댄서였던 노마 밀러(Norma Miller)는 공연 사전에 안무를 선보였으며, 때로는 공연자들이 사회적으로 춤을 추고 있다고 믿는 관광객들이 항상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1939년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위해 "지터벅"이라는 뮤지컬 넘버가 쓰여졌습니다.
"지터벅"은 서부의 사악한 마녀가 지터벅 스타일의 춤을 강제로 영웅들을 길들이기 위해 보낸 버그였습니다. 시퀀스는 영화의 최종 버전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마녀는 나중에 비행 원숭이 지도자에게 "나는 그들 중 싸움을 하기 위해 미리 작은 곤충을 보냈다"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주디 갈랜드가 도로시로 불렀고, 일부 대화는 "오버 더 레인보우"의 디스크 릴리스의 B-면으로 사운드트랙에서 살아남았습니다.

1944년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계속 개입하면서 춤을 추는 나이트 클럽에 대해 연방 소비세가 30%에 부과되었습니다.
세금은 나중에 20 %로 감소되었지만, "춤 금지"표지판은 전국에 올라갔고, 이 세금은 미국에서 레크리에이션 활동으로 공공 춤의 감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질러 불안감의 확산을 촉진. D-Day를 준비하기 위해 대서양 을 가로질러 1944년 5월에 영국 전역에 약 2백만 명의 미군이 주둔했습니다.
춤은 전쟁 전에 영국에서 인기있는 취미가 아니었으며, 많은 볼룸은 사업 부족으로 폐쇄되었습니다. 미군이 도착한 후, 이들 중 상당수는 라이브 밴드를 고용하기보다는 주크박스를 설치하며 다시 문을 열었고, 이전에는 레크리에이션으로 춤을 추지 않았던 노동계급 여성들이 미군과 선원들과 함께 참석자들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영국 사모아인들은 1944년 1월까지 지터벅의 "시비 버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D-Day 이후 미군이 떠난 후 1945년 11월까지, 영국 부부는 상류층의 승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활기찬 "무례한 미국 춤"을 계속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Time지는, 1945년 프랑스에 주둔했던 미군이 지터벅이 1946년 영국에서 불안감이 조성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지터벅 댄스는 초기 로큰롤에도 가미되어 이루어졌습니다.
로커빌리 뮤지션 야니스 마틴은 1956년 4월 노래 "드럭스토어 록 앤 롤"에서 로큰롤 댄스와 함께 지터버그를 동일시했습니다.

1957년 필라델피아에 기반을 둔 텔레비전 쇼 아메리칸 밴드 스탠드는 미국 방송사에 의해 포착되어 미국 전역에 상영되었습니다.
아메리칸 밴드 스탠드는 이날 인기 곡, 뮤지션들의 라이브 출연, 스튜디오에서 춤을 추는 등 다양한 곡으로 꾸며진 바 있는데, 이때 가장 인기 있는 패스트 댄스는 "린디보다 곡예가 약간 적은 스윙 시대 볼룸 시절의 열광적인 남은 것"으로 묘사된 지터벅이었습니다.

블루스 뮤지션 머디 워터스는 1960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동안 불안감을 만지며 관객들의 큰 환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의 공연은 녹음되었고, 1960년 LP 앳 뉴포트에서 발매되었습니다.
이후 엘비스 프레슬리를 통해 록큰 롤과 지터 벅 스윙은 크게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블루스 (Blues)

블루스는 19세기 중엽, 미국 노예 해방 선언 이후 미국으로 넘어온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창시한 장르 혹은 음악적 형태를 말합니다.
이 장르는 아프리카 전통 음악과 노동요 그리고, 유럽계 미국인의 포크송을 뿌리로 두는데, 구체적으로 스피릿 튜얼스, 노동요, 필드홀러, 링 샤우트, 찬트, 그리고 리듬이 간단하고 경험을 풀어낸 발라드 등이 합쳐져 개인이 부르는 노래로 바뀌어 블루스가 되었다고 합니다.

블루스 형식은 재즈, 리듬 앤 블루스, 로큰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주고 받기 형식(Call and Response), 블루스 스케일을 이용한 여러 코드 진행, 두 박자 또는 네 박자의 12마디로 진행하는 블루스가 일반적이며 장조와 단조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초기 블루스(컨트리 블루스)는 해방 흑인의 비참한 생활 환경, 인간적인 슬픔, 고뇌, 절망감 등이 드러나 있고, 대부분 본인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이나 경험, 그리고 아프리카-아메리칸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길거리 술집이나 시장터 축제에서 연주하는 블루스맨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퍼졌고, 독특하게 느린 블루스 리듬은 백인에도 널리 퍼져 많은 춤 곡이 나왔으며, 그러한 음악과 춤에도 블루스라는 이름이 붙어졌습니다.
블루스가 부각되기 시작한것은 19세기 말이며, 초기 블루스 스타일은 컨트리 블루스와 대개 솔로 가수가 직접 기타, 피아노 연주를 하고, 가끔 하모니카와 드럼을 같이 연주를 했습니다.
당시 잘 알려진 컨트리 블루스 뮤지션으로는 레드 벨리, 블라인드 레몬 제퍼슨, 로버트 존슨 등이 있습니다.

블루스라는 말이 노래에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90 ~ 1900년대 초이지만, 어원에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합니다.
그 중, 아프리카인의 장례 의식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블루 데빌스(Blue Devils)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현재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블루 데빌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입니다.

아프리카인의 장례 의식 설은 남부 아프리카인들이 죽음을 맞아 의식을 치를 때 의복을 청색(블루)으로 물들여 입음으로써 자신들의 슬픔, 고통 등을 표현한 데서 블루스란 말이 유래하였고, 남부 아프리카인들이 청색으로 물들일 때 사용하던 식물이 바로 '인디고페라 틴토리아'입니다. 이 식물은 미국 남부 노예 농장에서 많이 자랐으며, 이 풍습과 서부 아프리카 노예들이 목화를 재배할 때 부르던 노동요를 합쳐 우리가 알고 있는 블루스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입니다.

블루 데빌스는 우울과 슬픔을 의미하는 말이며, 이 말은 조지 콜먼(George Colman)의 원맨 광대쇼 〈Blue Devils〉 (1798)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17세기 영국의 표현 중 "강렬한 시각적 환각을 동반한 심한 알코올 금단 증상“intense visual hallucinations that can accompany severe alcohol withdrawal"이란 용어를 줄여 블루 데빌스라 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블루만 남아 블루스(Blue Devils)가 되었고 불안 상태 혹은 우울한 상태를 뜻하는 말로 바뀌었으며, 19세기 미국에선 블루스는 취하다란 속어로 쓰였습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블루스와 음주(drinking)가 합쳐져서 '블루 법 Blue laws'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블루 법은 아직도 몇몇 미국의 주에서 시행되는 일요일 알코올 판매 금지 법이기도 합니다.

블루스와 재즈

블루스와 재즈는 자주 논쟁거리로 언급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재즈가 블루스에서 파생되었다고 보거나, 재즈가 블루스의 시초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둘다 사실이 아닙니다.
블루스와 재즈는 마치 형제처럼 같이 양옆에서 자랐고, 블루스는 재즈의 기초 형성에 도움을 주었으나 재즈 혹은 블루스는 어느쪽에서든 파생되지 않았습니다.

정의로 구분하자면, 블루스는 음악적 형태와 장르, 재즈는 음악적 예술 형태입니다.
블루스와 재즈는 차이점들이 있지만, 사실 공통점이 많습니다.

1910~1920년대 등장한 초기의 블루스 뮤지션들은 거의 대부분이 미국 남부지역 출신 흑인이었고, 그 중에서도 블루스의 발원지로 거론되는 미시시피 유역은 거대한 목화 농장들이 모여있던 지역이다 보니, 다른 어떤 곳 보다도 블루스의 원류가 되었던 노동요나 할러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전통이 이들 초기 블루스 뮤지션에게 음악적인 토양을 만들어 주었음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로 불리기도 하는 초기의 블루스는 컨트리 블루스 혹은 포크 블루스로 불리기도 합니디. 클럽에서 대규모의 빅 밴드와 함께 연주하던 스윙 재즈와는 달리, 대부분의 블루스 뮤지션들은 떠돌이 악사들 수준이었으며, 어쿠스틱 기타나 하모니카가 악기의 전부였고 글을 읽거나 쓰기는 커녕, 악보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는 문맹의 흑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음악이란 풍부한 자원을 공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그들을 당시의 레코드 회사들이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습니다. 찰리 패튼(Charley Patton), 선 하우스(Son House), 로버트 존슨과 같은 뮤지션들이 하나 둘씩 레코딩을 시작했고, 백인들에게도 블루스의 존재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930년대
미국의 1930년대는 대공황과 2번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수백만 명의 흑인들이 남부를 떠나 북부 도시로 이동하게 되자, 블루스는 좀 더 넓은 지역으로 펴져나갔고, 도시 환경에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가사에도 도시풍의 주제가 사용되었고, 블루스 밴드들은 블루스 가수 외에도 피아니스트, 하모니카,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되었으며, 블루스는 처음엔 앨틀랜타, 멤피스, 세인트루이스에 맨 처음 정착되고, 그 후에 시카고와 뉴욕, 디트로이트 등지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도시풍의 블루스를 어반 블루스라 부르는데, 이 어반 블루스의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곳은 시카고였고, 어반 블루스는 컨트리 블루스의 요소와 도시적인 컬러를 적절히 융합한 절충주의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의 중요한 어반 블루스 스타일 중 하나로 부기우기를 뽑을 수 있습니다.

1940년대
1931년 일렉기타가 발명되고, 레스 폴, 로니 존슨, 시스터 로제타 타프, T-본 워커 (T-Bone Walker), 그리고 재즈 기타리스트 찰리 크리스천에 의해 일렉트릭 기타가 도입 된 이후, 1950 ~ 60년대부터 일렉기타는 팝 뮤직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가 됩니다.
이 시기부터 블루스 역시 일렉트릭 기타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는데, 티본 워커에 의해 블루스로 도입된 일렉트릭 기타의 사용은 대규모 콘서트 홀에서의 연주가 많아지기 시작한 블루스맨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었으나, 고출력 엠프를 동반한 일렉트릭 기타의 사용은 단지 사용되는 악기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어쿠스틱 기타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던 일렉트릭 기타만의 독특한 주법들이 사용되기 시작되었고, 본격적으로 모던 블루스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일렉트릭 블루스, 혹은 시카고 블루스라 부릅니다.
최근에 들어와 흑인 음악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리듬 앤 블루스는 사실 1940년대의 일렉트릭 블루스를 의미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일렉트릭 블루스가 재즈, 그리고 가스펠적인 요소를 받아들임으로서 탄생한 리듬 앤 블루스는 그 어떤 블루스 보다도 블루스의 전통에 가까운 블루스 음악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가장 흑인적인 음악이라는 리듬 앤 블루스가 백인적인 전통이 강한 음악 컨트리 앤 웨스턴과 합쳐짐으로써 인종을 초월한 음악 로큰롤이 탄생한 것은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부의 흑인노예들은 2번에 걸친 세계대전 기간에 주인이 해방시켜주었든, 몰래 도망치든 북부 대도시로 이동하게 되었고, 1940년대에 시카고와 같은 도시에서 전기로 소리를 증폭하는 일렉트릭 기타를 접하게 됩니다. 흑인들은 전기 증폭에 의해 마침내 컨트리 블루스에서는 없던 리듬을 만들게 되며, 리듬 앤 블루스는 그렇게 생성된 것입니다.
여기서 리듬 앤 블루스는 우리가 근래 일컫는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50 ~ 60년대
대중음악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블루스의 가장 큰 역할은 바로 "록 음악의 탄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 블루스의 성장과 함께 백인들이 블루스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블루스 음악을 백인들의 취향에 맞게 가공하면서 록 음악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며, 블루스의 성장과 록 음악의 탄생이 이뤄진 곳은 블루스의 발상지인 미국이 아닌 대서양 건너 영국 땅 이었습니다. 한편, 머디 워터스와 같은 블루스 열풍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영국안에서 밴드들은 전설적인 미국 블루스들을 따라하기 시작했고, 록을 기반으로한 영국 블루스 밴드는 1960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미국의 블루스 록이 로큰롤의 토대위에서 성장했다면 영국 블루스 록의 기초는 '스키플(Skiffle)'에서 활성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영국의 로커 빌리, R&B와 영국 컨트리 음악의 퓨전, 영국의 블루그래스 등으로 규정되는 스키플은, 초기의 가난했던 미국 흑인들의 블루스와 재즈를 연주하기 위한 영국인들의 시도에서 출발했습니다.

비틀즈의 멤버들이 중학교에 재적할 무렵 대 유행기를 거친 스키플 사운드는 로니 도니건(Lonnie Donegan)이 밴조를 연주하던 '켄 콜리어 밴드(The Ken Colyer Band)'에서 그 근원을 찾을수 있습니다.
그가 얼마 후 본격적인 스키플 사운드를 지향하는 '로니 앤 히즈 스키플 그룹(Lonnie & His Skiffle Group)'과 함께 런던의 로얄 페스티벌 홀에서 연주회를 가졌을 때 영국의 로커빌리는 활성화되기 시작했으며, 50년대를 히트 퍼레이드의 권좌에 앉아 화려하게 보낸 스키플이 본격적인 브리티쉬 블루스 록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초반의 일이었습니다.

알렉시스 코너(Alexis Korner), 시릴 데이비스(Cyril Davis), 스크리밍 로드 서치(Screamin' Lord Sutch), 그래험 본드(Graham Bond), 존 메이올 등의 선구자들에 의해 꽃 피우기 시작한 영국의 블루스는 자국의 탄탄한 음악적 전통 속에서 블루스의 본산지인 미국의 시도에 앞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들의 영향을 받은 롤링 스톤스, 비틀즈, 프리티 싱스(Pretty Sings)와 같은 밴드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브리티시 리듬 앤 블루스(British Rhythm and Blues)"로 불리는 영국 특유의 블루스 음악이 록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트로트 (Trot)

독특한 5음계를 음악적 특징으로 하며, 일본 엥카의 번역·번안 노래를 거쳐,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국내 창작이 본격화, 1930년대 중반에 정착된 대중가요 양식으로, 신민요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 스탠더드 팝이나 포크 등이 강세를 보이는 시기에 쇠락하지만, 새로운 양식들과의 혼융을 통해 계속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트로트라는 말은 서양의 춤곡인 폭스 트로트(fox trot)에서 왔지만, 한국 대중가요의 트로트 양식과 폭스 트로트는 2박자라는 점을 빼고는 관련성이 없습니다.
트로트는 ‘라시도미파’의 단조 5음계를 사용하거나, ‘도레미솔라’의 장조 5음계를 ‘라’의 비중을 높여 사용하는 독특한 음계를 지닌 노래로, 일본 대중가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양식입니다.

트로트라는 명칭은, 스탠더드 팝이 대중화된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이 양식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굳어지는데, 당시에는 스탠더드 팝이라는 명명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점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명명의 지체현상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라 보여지며, 1960년대 말에 이르러 ‘뽕짝’이라는 다소 비하적 명칭이 등장하여 꽤 오랫동안 공식적인 양식 명칭으로 통용되기도 했고 이 비하적 명명에 대한 반작용으로 1980년대 후반에 전통가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적어도 1970년대 이후에는 트로트라는 명칭이 가장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이 양식은 1920년대 「시들은 방초」 등 일본 엥카의 번역·번안곡이 인기를 모은 이후, 1928년 문수일 작사, 김서정 작곡의 「세 동무」에 이르러 창작곡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1932년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일명 「황성 옛터」)을 거쳐, 1934년 고복수가 부른 「타향」(일명 「타향살이」)과 1935년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에 이르러 그 형태가 확고히 정착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트로트는 단조 5음계로 고착되고 주로 2박자에 특유의 꾸밈음을 지닌 노래로 정착되었으며, 이 음악적 관행은 1970년대까지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고복수, 이난영, 장세정, 남인수, 백년설 등의 가수들이 등장하여 인기를 모았고, 1940년대 초에 들어서서는 「나그네 설움」(1940)을 비롯한 장조 트로트가 새롭게 등장하여 단조 트로트와 공존하기 시작했는데, 전시체제에 들어서서 단조 트로트가 지닌 강한 비극성을 다소간 약화시켜야 한다는 상황적 요구와, 일본에서 새롭게 유행한 대중가요 경향인 도추모노(道中物)의 영향이 그 원인으로 이야기됩니다.

해방 후에도 트로트 양식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며 인기를 모았고, 특히 분단과 전쟁 등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반영한 「가거라 삼팔선」, 「단장의 미아리고개」, 「꿈에 본 내 고향」 등으로 절창을 생산해냅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노래들이 점차 새로운 인기몰이를 시작했고, 1960년대 초 새로운 미국식 대중가요인 스탠더드 팝이 주류 양식으로 안착하면서, 상대적으로 트로트는 대중가요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잠시 쇠락하는 조짐을 보입니다.

그러나 1964년에 이미자가 부른 「동백아가씨」를 계기로 트로트의 인기는 부활하여, 1970년대 초까지 다시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 시기의 인기 가수는 이미자를 비롯하여, 「돌아가는 삼각지」의 배호, 「바다가 육지라면」의 조미미, 「가슴 아프게」의 남진, 「사랑은 눈물의 씨앗」의 나훈아, 「물새 한 마리」의 하춘화 등이며, 작곡가로는 백영호와 박춘석이 인기곡을 쏟아냈습니다.
가수 이미자와 배호로 대표되는 1960년대의 트로트는, 스탠더드 팝의 가창 방식을 받아들여 기교적인 꾸밈음을 절제하고 담담하고 중후한 가창을 유지했고, 반주에서도 빅밴드나 캄보밴드의 관현악 반주가 정착했으며, 특히 이 시기의 트로트는, 일제강점기의 트로트와 달리 시골을 연상시키는 가사가 많이 등장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트로트가 시골이나 저학력자, 하층민 등 좀 더 넓은 대중들에게까지 대중화된 결과라고 보여집니다.

1970년대 청년문화 붐으로 포크송이 새로운 유행으로 떠오르고 록도 함께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이들의 인기가 최고조에 도달한 1973, 74년경에는 트로트는 눈에 띄게 위축으나, 1975년 포크와 록이 대마초사건 등에 연루되어 급격히 위축된 후, 19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필두로 다시 트로트가 부활하고, 최헌, 윤수일 등 록그룹 출신의 솔로 가수가 록 사운드와 트로트 선율을 결합한 「앵두」, 「사랑만은 않겠어요」 등의 노래로 새롭게 인기몰이를 하면서 트로트는 또 한 번의 변신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트로트는 새롭고 참신한 양식이 아니라 익숙하고 편안한 양식이 되었고, 고학력과 대도시의 젊은 수용자들이 아닌, 유행에 덜 민감한 중장년이나 저학력과 낮은 계층의 취향으로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1980년대에는 속칭 ‘뽕짝 메들리’라고 불리는, 옛 인기 트로트 곡을 같은 속도로 단순하게 연주되는 전자악기 반주에 맞춰 끊임없이 이어 부르는 방식의 음반이 지속적으로 인기를 모았고, 이러한 메들리 음반의 대표 격인 『쌍쌍파티』에서 두각을 나타낸 가수 주현미가 「비 내리는 영동교」를 불러 솔로로서의 인기몰이에 성공하면서, 트로트의 인기 경향은 다시 한 번 변화하게 됩니다.

1990년대 이후 트로트는 비극성을 거의 지니지 않게 되었고, 유흥의 자리에서 흥을 돋우는 데에 적합한 신나는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1960년대 말의 「소양강 처녀」나 1980년대 「남행열차」가 1990년대 이후 이런 방식으로 널리 불리는 노래로 정착했고, 새롭게 발표된 태진아, 설운도 등의 노래 역시 신나는 분위기를 지녔습니다. 이 경향은 2000년대 장윤정이나 박현빈 등의 노래에 이르면 더욱 심화되었으며 음악적으로도 더 화려해졌습니다.

의의와 평가
양식이 정립되던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대도시의 세련된 양식으로 받아들여졌던 트로트는, 이를 압도하는 미국 대중가요풍의 경향이 대두되던 1950년대 후반부터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우선, 일본 대중가요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서 형성된 양식이라는 점에서 ‘왜색’, ‘일제 잔재’로 청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며, 특히 1960년대 한일수교나 1980년대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한 반대여론이 드세어질 때에, 가장 손쉽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 「동백 아가씨」 등의 적지 않은 곡이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고, 1984년에는 음악전문지와 일간지를 넘나들며 트로트의 일본색에 대해 논쟁한 이른바 ‘뽕짝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 트로트가 지나친 애수의 감정을 담고 있어 퇴폐적이고 불건강하다는 비판 역시 중요한 근거가 되었으며, 특히 해방 이후에 태어난 전후세대들에게는 트로트의 신파적 질감이 낡고 세련되지 못한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비판의 초점이 된 측면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한편, 트로트가 지닌 양식적 독특함 덕분에, 이를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큼 역사적 거리가 확보된 이후에는, 그 의미가 재해석되어 작가주의적인 창작의 재료로 활용되었고, 완전히 새로운 편곡을 통한 리메이크의 재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작가주의적 활용의 시도는 1970년대 송창식의 「왜 불러」, 정태춘이 짓고 박은옥이 부른 「양단 몇 마름」, 그리고 1990년대 후반 어어부밴드의 「아름다운 ‘세상에’ 어느 가족 줄거리」, 정태춘의 「나 살던 고향」 등이 대표적이며, 새로운 편곡을 통한 리메이크로는 1970년대 해바라기의 「추억의 백마강」(원제, 꿈꾸는 백마강), 1980년대 한대수의 「목포의 눈물」에서 시작된 이후, 2000년대에는 블루스 가수인 한영애나 재즈 가수인 말로 등이 트로트를 중심으로 한 옛 가요 리메이크 음반을 낸 바 있습니다.